한국 세종대왕의 여민동락(與民同樂) 리더십

1. 한국 세종대왕의 즉위와 국경확장 및 균형발전

한국 세종대왕의 여민동락(與民同樂) 리더십에서, 세종대왕(이하, 세종으로 부름)은 1397년(조선 건국 태조 6년) 5월 7일,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통인동에서 태종(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과 원경왕후(민씨)의 여섯 번째 자녀이자,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세종은 어려서부터 독서와 공부를 좋아하였으며 형제간 우애가 깊고 부모에게 지극한 효자로 알려져 있다.

[세종대왕_세종지음도]

세종은 1418년 8월 조선의 제4대 국왕으로 즉위하여 1450년 2월까지 32년간 재위하였다. 젊은 시절 무리하게 국정을 돌본 탓에 집권 후반부터 몸이 좋지 않아 시각 장애 및 여러 질병으로 고통을 겪었으며 1450년 3월 30일에 승하하였다. 세종은 재위 시절 신분을 가리지 않고 유능한 인재를 많이 등용하여 국정을 분담케 하였으며 깨끗하고 참신한 정치를 펼쳤다.

세종은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효율적이고 과학적인 문자 체계인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여 오늘날 대한민국의 공식 문자로 널리 쓰이도록 하였다. 이뿐만이 아니라 인사와 군사에 관한 일은 자신이 직접 처리함으로써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었다.

1419년(세종 1년), 왜구가 침입하자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정벌케 하였으며 1430년(세종 12년)에는 명나라에 말과 명주, 인삼 등 다른 공물을 더 보내고 공녀와 금은 조공은 중지하게 하였다. 또한 평안도와 함길도에 출몰하는 여진족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으로 국경을 확장하였고,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실시하여 국토의 균형발전을 위해서 노력하였다.

2. 한국 세종대왕의 과학기술 발전과 국민 안위에 정진

또한 간의, 혼천의, 혼상, 일성정시의, 앙부일구, 자격루, 측우기 등 백성들의 생활과 농업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과학 기구 발명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아래 그림 순서대로 세종간의, 세종혼천의, 세종앙구일부, 세종천평일구측우기, 세종현주일구, 세종측우기).

이 밖에도 법전과 문물을 정비하였고 전분 6등법과 연분 9등법 등의 공법(貢法)을 제정하여 조세 제도를 확립하고 천문과 역법, 금속활자와 인쇄술, 도량형 통일, 총통제작, 음악 정비, 서적 편찬, 법전 정비, 형옥 제도 확립에도 업적을 남겼다.

세종은 일부 관료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관비가 출산할 경우, 1주일의 산후 휴가만 주었던 관행에서 출산 후 100일을 쉬도록 명하였고 관비의 남편 역시 산후 1개월의 휴가를 주도록 하였다. 그리고 노비를 가혹하게 다루거나 살인을 저지르는 자는 법령에 따라 엄중히 처단할 것을 명하였다. 세종 26년(1444년), 《세종실록(1418년 8월 즉위년에서 세종 32년인 1450년 2월 승하까지 기록한 세종의 역사서)》는 아래와(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노비는 비록 천민이라고 하나, 하늘이 내린 백성 아님이 없다. 신하 된 자로서 하늘이 낳은 백성을 부리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것인데, 그 어찌 제멋대로 형벌을 행하여 무고한 사람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임금의 덕(德)은 살리기를 좋아해야 할 뿐인데, 무고한 백성이 죽는 것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금하지 않고 그 주인을 치켜세우는 일이 과연 옳은가? 나는 매우 옳지 않다고 여긴다.

이 밖에도 노인을 우대하였으며, 쌀과 의복을 내려 도움을 주었고 때로는 양로연을 열어 위로하였다. 승정원(왕명의 출납을 맡았던 임금의 직속기관으로 오늘날 대통령비서실에 해당)에서는 노인 중 천민을 양로연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상소하였으나 세종은 이를 크게 꾸짖고 신분과 관계없이 죄 지은 자가 아니면 모든 노인을 참석하게 지시하였다.

3. 한국 세종대왕의 여민동락(與民同樂) 리더십

변혁적 리더십 등 리더십에 관한 많은 연구가 진행되는 가운데 후대의 연구자들은 이러한 세종의 리더십을 여민동락(與民同樂)으로 부르고 있다. 맹자는 “혼자 즐기는 것보다 여럿이 함께 즐기는 게 낫고, 소수의 사람과 즐거움을 나누기보다 많은 사람과 나누면 더 즐겁다”라고 하면서 여민동락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이상 정치의 정도임을 강조했다1.

실제 권력자가 백성들과 여민동락하기는 쉽지 않은데 역사의 기록물과 후대의 연구자들은 세종을 “백성과 함께 즐거움을 누리는 여민동락”을 가장 잘 실천한 정치인이자 성군으로 꼽는다. 권력은 외면을 꾸미고 힘을 과시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구성원들은 권위를 내려놓고 함께 웃고 우는 리더에게 진심 어린 지지와 존경을 보내고 그를 따르는 것이다.

최근 문헌에서는 세종이 백성의 삶의 질에 미친 성과를 ‘장수(長壽)’, ‘부유(富裕)’, ‘강녕(康寧)’과 ‘고종명(考終命, 제명에 죽는 것)’의 4가지 척도로 탐색하고 재위 5년(1423년) 강원도 지방의 대기근을 조정이 어떻게 대응하였는지 연구되기도 하였다.

이 문헌에 의하면 세종은 수리시설 개간 및 북방 영토개척 등으로 경작지를 증가시키고 국가의 재정과 백성들의 경제력을 향상시켰지만 하루 한 끼로 살아가는 굶주린 백성들이 여전히 있다는 말을 듣고 “매우 마음이 아프고 불쌍히 여겨 얼굴빛이 변했으며 지방 특산물 공납을 면제”하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세종 8년(1426년)에는 도성의 초가집들이 불타는 대규모 화재 이후에 “도로를 넓혀 사방으로 통하게 하고 대형 화재의 원인 중 하나인 초가를 개량하여 기와집으로 바꾸는 대대적인 사업을 추진”하였다.

또한 요절 혹은 비명횡사 없이 제 수명을 다해 가족 앞에서 편히 죽는 ‘고종명’은 예나 지금이나 중요하지만 누구나 누릴 수 있는 ‘복’은 아니다. 세종은 천재지변 이외의 일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예방과 사후조치의 중요함을 언급하면서 ‘사람의 힘’을 강조하였다.

세종은 유아사망률을 낮추기 위해 “종래 버려진 아이들을 제생원(濟生院, 의료기관)의 노비들에게 맡겨 기르던 일을 별도로 제생원 옆에 집을 지어 자원하는 사람에게 일정한 급료를 주면서 구호하도록 하였다. 겨울철에는 덮을 것, 소금, 장(醬), 진어(陳魚), 젓갈, 미역 등의 물건을 모두에게 넉넉히 지급”하도록 했다. 또한 어린아이를 버린 자를 고발하면 상을 주고 버린 어린아이를 받아 기르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도록 했으며 가난하여 혼인을 못한 사람은 친족들이 보살펴 혼인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아래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후대의 학자 중에는 세종의 보살핌을 ‘생명존중’, ‘민생해결’ 및 ‘교화소통’을 주제로 연구하였기도 하였으며 세종의 공공성을 주제로 ‘여민의 공공’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또한 미래를 준비하는 세종의 통찰력을 각각 “애민(愛民), 여민(與民), 위민(爲民)”과 “장래준비, 학습사회, 징조탐색”으로 연구하였다.

다른 문헌에서는 세종의 리더십과 비전을 ‘공감능력’과 ‘감수성’, 그리고 ‘정치적 균형감’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세종의 소통정치에 대하여 ‘경연과 공공철학’, ‘상향 리더십’으로 연구하였다. 세종과 성종을 비교하여 연구한 문헌도 있는데 특히, 세종의 경우는 국가의 비전과 사명을 ‘화합정치’, ‘민유방본(民惟邦本, 백성이 오직 나라의 근본)’, ‘생생지락(生生之樂, 살맛나는 즐거움)’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인재중시’, ‘공론정치’, ‘종교(불교) 포용’, ‘세자(문종) 섭정’을 연구하였다.

구분내용연구자
국가사명정치화합, 민유방본, 생생지락, 학습사회방상근(2019), 박성원(2018)
개인특성공감능력, 감수성, 정치적 균형감, 장래준비, 징조탐색강상규(2016), 박성원(2018),
여민실천장수, 부유, 강녕, 고종명, 민생해결, 생명존중, 교화소통, 공공성, 미래준비, 종교포용박현모(2009), 정윤재(2009), 조성환(2013), 임기철(2014), 방상근(2019)
소통정치인재중시, 공론정치, 경연과 공공철학, 상향 리더십, 세자섭정방상근(2019), 김재익(2017), 박현모(2019)
[세종의 여민동락 리더십 연구]

세종이 직접 작성한 즉위교서를 보면 세종의 사명과 비전이 담겨있다. 이는 선왕의 업적을 더욱 발전시키되 급격한 변화나 정치보복은 없으며 화합을 도모하겠다는 세종의 의지이자 어진 정치로 국가를 세우겠다는 사명이기도 하다. 세종 즉위년(1418년), 《세종실록》은 아래와(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태조께서 나라를 세우시고 부왕께서 큰 사업을 이어받으시니, 삼가고 조심하여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 (중략) 모두 태조와 우리 부왕께서 이루신 법도를 따를 것이며 변경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거룩한 의례에 부쳐 마땅히 너그러이 사면을 선포한다. … (중략) 지위를 바로잡고 그 처음을 삼가며 종사의 소중함을 받들어 어진 정치를 행하여야 비로써 땀 흘려 이루어 주신 은혜와 덕택을 밀고 나아갈 수 있으리라.

세종은 지방의 관료들에게 “백성들과 함께 태평시대의 즐거움을 누려야 함”을 강조했으며 세종 본인도 이 사명을 위해 신명을 바쳤다. 세종 26년(1444년)《세종실록》은 아래와(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 것인데, 농사는 옷과 먹는 것의 근원으로서 왕실의 정치에서 먼저 힘쓸 것이다. 그것은 오직 백성을 살리는 하늘의 명인 까닭에, 천하의 지극한 노고로 일하는 것이다. 위에 있는 사람이 성심으로 지도하여 거느리지 않으면 어떻게 백성들이 부지런히 힘써 농사에 종사하고 그 생생지락을 완수할 수 있겠는가?

4. 한국 세종대왕의 감수성과 경연의 정치

아래 그림은 세종영정과 세종주자소도, 세종지음도, 세종집현전학사도이다.

세종의 백성을 사랑하는 애틋함은 그가 높은 감수성과 공감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으로 이것은 세종이 성공적으로 국정을 운영할 수 있었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앞에서도 살펴본 노비의 출산 휴가 제도를 보면 사회적으로 가장 힘없는 사람들의 삶을 헤아리는 배려가 그 시대의 상식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놀라운 발상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시대의 관습과 계급을 넘어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자각과 공감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판단이다. 세종의 이러한 감수성과 공감능력은 죄수들에 대한 배려에서도 잘 드러난다. 세종 7년(1425년)《세종실록》은 아래와(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옥(獄)이란 것은 죄지은 사람을 징계하는 것이지 사람을 죽게 하려는 본의는 없다. 관리자가 마음을 써서 옥을 고찰하지 아니하고 심한 추위와 극심한 더위에 사람을 가두어 질병에 걸리게 하고, 혹은 춥고 배고픔에 비명으로 죽게 하는 일이 없지 아니하니, 진실로 가련하고 민망한 일이다. 중앙과 지방의 관료들은 나의 지극한 뜻을 받들어 항상 몸소 상고하고 살피며 옥내를 수리하고 청소하여 늘 정결하게 할 것이요, 질병 있는 죄수에게는 약을 주고 치료하여 구호할 것이며, 옥바라지할 사람이 없는 자에게는 관아에서 옷과 먹을 것을 주어 구호하게 하라. 마음을 써서 이를 거행하지 않는 자는 서울 안에서는 사헌부에서, 다른 지방에서는 엄격히 감찰하여 다스릴 것이다.

세종 7년(1425년)《세종실록》의 다음 기록을 보면 세종이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애틋한 마음에 감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의정부와 육조에서 대궐에 나아가 문안하였다. 임금이 가뭄을 걱정하여 7월 18일부터 11일간 밤을 지새우며 애타게 비를 기다리다 병이 났으나 외인에게 알리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때서야 여러 대신이 알고 고기반찬을 드시기를 청하였다.

세종은 백성의 고통을 마치 자신의 것으로 느껴 왔으며, 세종의 이러한 깊은 고민은 인류사 최대 발명품인 훈민정음이라는 새로운 문자의 창제로 이어졌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훈민정음 서문을 보면 세종의 간곡한 마음을 잘 확인할 수 있다(세종 28년(1446년)《세종실록》).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우매한 백성들이 말하고 싶어도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것을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들이 쉽게 익히고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한다.

한국 세종대왕의 여민동락(與民同樂) 리더십에서, 조선시대 ‘경연’이라고 함은 유교 경전의 ‘경’ 자와 자리를 뜻하는 ‘연’ 자가 합해져 생긴 이름으로 임금에게 유교경전(경서)과 역사서(사서)를 가르치는 교육제도이다. 그러나 세종은 이를 “전대의 임금처럼 신하가 주도적으로 임금을 공부시키는 자리가 아니라 임금이 신하와 함께 책을 읽고 논하는 자리”로 운영하는 리더십을 보여 주었다. 특히 세종은 경연에서 현안을 다루지 않았으며 정치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기구로도 운영하지 않았다. 오늘날로 말하면 일종의 주로 철학과 역사를 논의하는 인문학 시간처럼 운영하였다. 세종 7년(1425년)《세종실록》은 아래와(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오늘의 편안함을 믿고 내일의 환란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경서를 깊이 연구하는 것은 실용을 위한 것이다. 경서와 사기를 깊이 연구하여 다스리는 도리를 보면 그것이 보여 주는 나라 다스리는 일은 손을 뒤집는 것처럼 쉽다. (그러나) 실지의 일에 당면하면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일이 있을 것이다. 비록 내가 경서와 사서를 널리 찾아 읽었지만, 오히려 아직 능하지 못하니 이것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세종의 이러한 리더십은 경서와 사서를 다루는 목적이 바로 국가를 다스리는 철학과 도리를 탐구하며 역사적인 사례를 통하여 실제 정치로 활용하는 영향력을 보여 준다. 다시 말해서 세종은 ‘경연’을 통하여 참석한 신료들과 국가를 다스리는 철학을 공유하고 이를 실제로 국정을 운용하려는 의지를 보여 준 것이라 하겠다.

  1. 위키백과(2021), “조선_세종”, https://ko.wikipedia.org/wiki/.; 박현모(2009), “세종은 백성들의 ‘삶의 질’을 어떻게 높였나”, 정신문화연구, 32(2), 111-136.; 정윤재(2009), “세종대왕의 천민/대천이물론과 보살핌의 정치”,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8(1), 145-161.; 조성환(2013), “[공공단상] 백성과 함께, 세종의 여민정치”, 월간 공공정책, 95, 76-80.; 임기철(2014), “백성을 중심에 두고 미래를 열다”, FUTURE HORIZON(19), 6-7.; 강상규(2016), “공감능력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 세종의 정치적 리더십”,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15(2), 63-91.; 이치억(2016), “여민동락(與民同樂), 좋은 리더의 힘 in Redesigning Performance Management”, DBR(동아비즈니스리뷰), 198호.; 김재익(2017), “[공공단상] 세종의 경연과 공공철학 대화”, 월간 공공정책, 139, 78-82.; 박성원(2018), “장래를 예측하고 징조를 살핀 리더”. FUTURE HORIZON(35), 26-29.; 방상근(2019), “수성에서 교화로: 세종과 성종의 리더십 비교”,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18(1), 59-93.; 박현모(2019), “세종시대 승정원의 운영과 도승지의 상향(上向)리더십 고찰”, 정치사상연구, 25(1), 242-264.; 사례연구의 세종실록 내용은 이상의 여러 논문을 참조하였음. ↩︎